근대 교육의 선구자 코메니우스의 생애
유아의 놀이를 강조하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감각활동을 중시했으며, 자연적 순서에 따르는 교육과정 진행했다.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단계적 순서에 따라서, 유아의 흥미와 욕구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충분한 자료 준비를 하며, 분석보다는 관찰, 규칙보다는 사례, 말보다는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강조했다.
1) 코메니우스의 시작: 시련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나타난다.
코메니우스는 1592년 3월 28일 우헤르스키 브로드(Uhersky'Brod)근처 동 모리비아의 한 마을인 니브니체(Nivnice')에서 아버지 마르틴 코멘스키와 어머니 안나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1993년 벨벳 이혼으로도 유명하고 현재까지도 꽤나 복잡한 곳이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터진 때와 같은 시기다. 그의 이름은 체코어로 코멘스키(Komensky)이며, 이 후 청년기에 라틴어로 바꾸어 아모스 코메니우스(Amos Comenius)로 개명하게 된다.
교회에 대한 종교적 믿음 속에서 성장했으나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잘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10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살에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잃게 된다. 그의 고모가 고아가 된 그를 슬로바키아 국경, 남 모라비아의 스트라즈니체(Straznice)에 있는 자기 집에 데려다 돌보았다. 거기서 잠시 형제연합교회가 세운 마을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13세에 그 지역이 습격을 당하고 마을은 불에 타 없어져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코메니우스는 다시 고향 니브니체(Nivnice)로 돌아가 그곳에서 그의 후견인이었던 방앗간집 주인으로부터 농사일과 수공의 일들을 배우게 된다. 그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했고, 일찍부터 육체적인 노동으로 시달리기도 하였다.
2) 그의 학문적 기반을 만든 두 학교: 헤보른, 하이델베르그 대학
하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액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고, 1608년에 후견인의 도움으로 프로레브(Prorev)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소속인 한 인문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동안 공부한 후, 19세에 그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탁월한 학생으로서 이미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인 요한 랑네키우스(Langnecius)로부터 주목받고 있었다. 그는 재능을 가진 가난한 학생 코메니우스가 독일의 헤보른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계속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게 된다. 이 두 대학들은 코메니우스에게 신학적으로 깊은 통찰을 제공해 준 독일지역 학교들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들 독일의 두 대학, 헤보른과 하이델베르그에서 세분 교수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헤보른 대학에서는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H.Alsted:1588- 1638)와 요하네스 피셔(J.Fischer:1546-1622) 교수였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는 다빗 파레우스(D.Pareus: 1548-1625) 교수였다.
3) 그의 정신적 기반을 만든 세 교수
먼저 알스테드 교수는 철학자요, 또한 신학자였다. 그는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콜라적 전통에 서 있는 탁월한 교수였으며, 신학적으로는 개혁신학(칼빈주의)의 정통 노선에 서 있는 학자였다. 그는 특히 1618-19년에 화란 도르트레히트에서 개최된 유럽개혁교회의 첫 총회에 독일개혁교회의 신학자대표로 참석했던 사람이다.
그의 학문적인 작업에는 백과사전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능한 모든 학문적인 정보를 담아내는 백과사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바로 알스테드에게서 이와 같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중요한 인용문들을 기록하며,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학문적인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후에 범지혜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두 번째 교수인 피셔는 성경 신학자였다. 피셔는 스트라스부르그 출신으로 그는 1584년에 헤보른대학의 학장이었으며, 성경신학자로서 성경 번역과 주석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말론은 그 당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물론 코메니우스는 이미 형제연합교회에서 배웠던 성경의 가르침과 교수들의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코메니우스가 깨닫게 된 것은 선생들이 가르친 것처럼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 일을 해내야 하는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것이었다.
코메니우스의 세 번째 스승은 파레우스였다. 코메니우스는 헤보른에서 공부를 마치고, 화란 암스테르담으로 여행을 하고 온 후,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등록하였고, 거기서 파레시우스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평화사상을 끌어내어 평화신학적으로 사고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파레우스는 그 당시 여러 그룹으로 분리되어 있는 유럽의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을 함께 서로 화해하고 연합하는 시도를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복음의 화해정신을 삶에서 실천하는 교훈을 코메니우스가 받게 된 것이다.
이 세명의 교수들의 영향을 크게 입게 된 코메니우스는 후에 범지혜 사상에 근거하여 전 인류가 범지혜의 배움인 전인구원을 위한 전인교육계획과 전 세계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영역을 넓히게 된다.
이처럼 그는 기독교적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코메니우스는 기독교적인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자 교육학을 집대성했는데, 3명의 기독교 교수들에게 사사받은 내용을 더해 모든 기독인들의 책임으로 학교교육개혁(학문), 국가개혁(정치), 교회개혁(신학)을 제시하게 된다.
4) 코메니우스의 여러 저술들
1631년 Fanua Liguarum(The Gate of Languages Unlocked)을 출판하게 되고 이 책에서 라틴어의 단어들은 그것이 사물이나 개념들과 연상되지 않는 한 학생들이 활용할 수 점을 강조함으로써 라틴어 교수법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언어는 과학, 철학, 정치학 등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지도되어야 함도 지적하고 있다.
1632년 “대교수학”을 완성하게 되는데 모든 어린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교육원리, 교수법 등에 대한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서는 그 시대 200여 년 동안 사장되어 있었으며. 1840년대에 와서야 코메니우스의 사상과 저서가 재발견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의 생애는 비참과 불운의 연속이었건만 또 각지로 망명생활을 하는 속에서도 그는 교육자, 교육개혁가, 또는 교육저술가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근대교육의 건설을 위한 선구적인 교육개혁가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는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채 1670년 11월 15일 암스텔담의 객사에서 78세의 고령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쳤다. 코메니우스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으나 교육적인 것으로는 다음의 4종이 있다.
첫째, 라틴어 교과서이다. 4부로 성립되고 있다. 어학입문, 어학전개, 어학비결, 어학보고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언어교수론인 “어학최신교육법”(1648)이다. 셋째, 세계도회(1658)로 이것은 세계 최초의 그림이 든 교과서로서, 직관교수의 구체화로서 교육사상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넷째, 일명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물을 가르쳐야 하는 교술”(1657년)이다. 이것은 교육에 관하여 조직적으로 논술한 세계최초의 교육학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교육사상이 가장 체계적으로 담겨져 있는 책이다.